장덕
Jang Deok

1961~1990



생애 ∙ Biography


1961.04.21
  • 서울 출생

1972
  • 오빠인 장현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기타로 작곡 시작.

1975
  • 오빠 장현와 함께 ‘드래곤 래츠(Dragon Rats)’ 결성.
  • 미8군 주최 아메리칸앰버시클럽(American Embassy Club) 파티 무대 공연을 시작으로 미8군 클럽에서 활동. 당시 장덕이 작곡한 곡에 미군 장교인 엘 클리나드가 작사한 ‹To Be A Child Again›을 처음으로 발표했다고 전함.
  • 5월 TBC ‘오라오라’ 출연. ‹꼬마인형›, ‹일기장›(장덕 작사·작곡)으로 최연소 남매 듀엣 데뷔. ︎︎︎참고영상
  • 자신의 곡 ‹꼬마인형›과 ‹일기장›으로 영화 ‹푸른교실›(김응천 감독) O·S·T에 참여

1976
  • 안양예술고등학교 진학.
  • ‘드래곤 래츠’를 ‘현이와 덕이’로 바꾸고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친구야 친구야›(오아시스레코드, 76.04.05.) 발매. ‹친구야 친구야›(김기웅 작사, 작곡), ‹사랑한다고 말해주오›(정소녀, 최병결의 곡 리메이크) 등 3곡 수록.

1977
  • 77‘ 서울국제가요제에 ‹소녀와 가로등›(장덕 작사·작곡)의 작곡가 자격으로 가수 진미령과 함께 출연. ︎︎︎참고영상
    이는 우연히 장덕의 ‹소녀와 가로등›을 들은 송창식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뤄진 것으로, 장덕이 이 곡을 작사, 작곡했을 당시의 나이는 중학교 2학년 이였음.
  • 영화 ‹사랑은 안녕›(박태원 감독, 장덕·장현 주연)에 자신의 곡 ‹정말›로 O·S·T 참여.
  •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임원식 감독) 주연.
  • 영화 ‹선생님 안녕›(임원식 감독) 주연.

1978
  • 78‘ MBC 서울국제가요제 ‹더욱 큰 사랑›(장덕 작사·작곡, 장현 노래) 입상. ︎︎︎참고영상
  •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주연(김응천, 석래명, 문여송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 현이와 덕이 첫 번째 정규 앨범 ‹순진한 아이›(힛트 레코드, 78.04.) 발매. ︎︎︎참고영상
  • 모든 수록 곡은 장덕 작사, 작곡으로 1977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진미령이 불렀던 ‹소녀와 가로등›이 장현의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음.
  • 현이와 덕이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 ‹디스코 크리스마스›(서라벌레코드, 78.11.20.) 발매. ︎︎︎참고영상
  • 이 앨범에는 포크, 블루스 뮤지션으로 유명한 이정선이 편곡자로 참여하였음.

1979
  • 컴필레이션 ‹현이와 덕이 장덕의 고운노래 모음 VOL.1 첫사랑/소녀와 가로동›(지구레코드, 79.06.30.) 발매. ︎︎︎참고영상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 건전가요를 제외한 전 곡을 장덕이 작사, 작곡하였음.
  • 79‘ MBC 서울국제가요제에 ‹사랑이었네›(장덕 작사·작곡, 박경희 노래) 가야금상 수상. ︎︎︎참고영상

1980
  • 80‘ MBC 서울국제가요제 ‹사랑은 떠나도›(장덕 작곡, 최병걸 노래) 출품  ︎︎︎참고영상
  • 장덕 1집 ‹순정/만날 수 없는 사람›(지구레코드, 80.06.17.) 발매.
    솔로 1집과 마찬가지로 전곡을 장덕이 작사, 작곡.
  •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State of Tennessee Nashville)로 이주,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 입학-미국 테네시 주립대학 실용음악과(작곡) 재입학하여 음악 공부.
  • USA 한인방송 ‹한국인의 샘› DJ 활동
  • 내슈빌 작곡가 협회 가입.

1981–1983
  • 결혼, 리 패밀리(Lee Family)를 결성하여 보컬과 퍼스트 기타로 활동.
  • KBS 세계가요제에 출품한 ‹사랑은 영원히›(장덕 작사, 김파 작곡) 본선 진출.
  • 1983년 이혼 후 한국 귀국, 서라벌레코드와 계약 후 정규앨범 발표
  • 장덕 솔로 정규 2집 ‹날 찾지 말아요›(서라벌레코드, 83.12.10.) 발매. ︎︎︎참고영상
    장덕이 발매한 다른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곡들은 장덕 작사, 작곡임. 타이틀곡인 ‹날 찾지 말아요›는 앨범 발매 이후 6개월 만에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에서 집계한 '1984년 5월 동안 방송을 가장 많이 탄 노래' 부문 3위에 오름.

1984
  •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이미례 감독)의 음악 작업.
  • 장덕 솔로 정규 3집 ‹사랑하지 않을래›(서라벌레코오드사, 84.11.10.) 발매.
    수록된 곡들 중 ‹사슴여인›(박건호 작사, 계동균 작곡), ‹여자의 샘›(김문엽 작사, 장덕 작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장덕이 작사, 작곡.

1985
  • 오빠인 장현의 제안으로 ‘현이와 덕이’ 재결성
  • 현이와 덕이 두 번째 정규앨범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아세아레코드, 85.06.20.) 발매. ︎︎︎참고영상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장덕과 장현이 각각 작사, 작곡을 맡아서 작업한 곡들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음. 타이틀 곡인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는 가요 순위 10위 권 안에 순조롭게 진입했고 다운타운가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음. 

1986
  • 장덕 솔로 정규 4집 ‹님 떠난 후/이팔청춘의 고백› (아세아레코드, 86.) 발매 ︎︎︎참고영상1  ︎︎︎참고영상2
    프로듀서로 밴드 사랑과 평화의 김명곤이 참여했고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은 장덕이 작사, 작곡.  
  • 귀국과 제2의 전성기

1987
  • ABU 가요제(말레이시아) 에 한국대표로 출연. 곡 ‹너를 기다릴 거야›
  • 장덕, ‹님 떠난 후› 가요톱10 5주간 1위를 차지하며 골든컵 수상(1987.02.18.~1987.03.18) KBS 2FM 인기가요 광장, MBC 라디오 인기가요, PCI(인기가요순위 조사연구소), 전국 DJ 연합회 등의 인기 순위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함.
  • 장덕 ‹골든앨범›(두봉기획, 87.07.15.) 발매. ︎︎︎참고영상
    TAPE에는 ‹왜 나에게›와 ‹비바 챔피언›이 포함되어 있음.

1988
  • 장덕 ‹골든앨범/그녀의 모든것›(서울음반, 88.) 발매. 김트리오의 김파와 협업.
  • 장덕 솔로 정규 5집 발매 ‹얘얘/나를 불러줘/나의꿈 이야기›(두봉기획, 88.09.20.) 발매. ︎︎︎참고영상
  • ‹서울의 밤거리›, ‹얘얘›, ‹나의 꿈 이야기›는 김트리오의 김파가 작곡하였고 ‹내말 좀 들어요›는 김범룡이 작사, 작곡 하였음.

1989
  • 장현 ‘코아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장덕의 본격적인 매니지먼트 활동 시작.
  • 장덕 솔로 정규 6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슬픈 약속/나의 공주님›(현대음반, 89.06.) 발매.  ︎︎︎참고영상
  • 장덕의 솔로 정규 6집은 LP, TAPE, CD 모두 동일한 곡이 수록되었고 모두 장덕이 작사, 작곡하였음.
  • 오빠 장현, 설암 3기 진단.

1990
  • 드라마 ‹구리반지› 출연 ︎︎︎참고영상
  • 1월 20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출연. 생전 마지막 음악 프로그램 출연이었음.
  • 2월 4일 새벽 사망. 그녀의 룸메이트이자 의상디자이너의 전언에 따르면 장덕이 당시 언론의 보도처럼 수면제나 약물을 과용한 적은 없었다고 함. 당시 장덕은 평소보다 많은 곡을 작업하고 있었고 다음날 하춘화의 신곡 가녹음을 준비하던 중이었다고 전함.
  • 6월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뉴서울레코드, 90.06) 발매. 위일청, 이선희, 임지훈, 김범룡, 박혜성, 전영록, 최성수, 진미령 등 12인의 동료 가수들이 참여. 가수들의 리메이크 곡 외 장덕의 미발표 곡이었던 ‹일어나›와 ‹내가 만나는 하나님에게› 수록.
  • 8월 16일 장현 설암 악화로 사망.

1992
  • 현이와 덕이 유작앨범 ‹만날 수 없는 사람›(현대음향, 92.03) 발매.

2020
  • 12월 남이섬 장덕 기념비 건립.
  • 루비레코드 故장덕 30주기 ‘장덕 Tribute Project 진행.

앨범목록 ∙ Discography







장덕의 또 다른 노래


  • 진미령 - 소녀와 가로등
  •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서울가요제 / The 1st SEOUL SONG FESTIVAL '77 (1977. 힛트레코드) 
  • 장현 - 더욱 큰 사랑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78 서울 국제 가요제 (1978.10.07. 지구레코드)
  • 박경희 - 사랑이었네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79 서울 국제가요제 (1979.06.20. 지구레코드)
  • 최병걸 - 사랑은 떠나도
    작사 : 장덕, 작곡: 장덕. 앨범 : 최병걸 - 나는 떠나가네/사랑은 떠나도 (1981.04.25. 한국음반)
  • 김트리오 - 사랑은 영원히
    작사 : 장덕, 작곡 : 김파. 앨범 : 김트리오 - 2집 (1980.04.19. 현대음반)
  • 국보자매 - 백치미, 사랑하고 있나봐요, 끝없는 마음이야, 첫사랑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국보자매 - 너무너무 사랑해/사랑의 잎새, (1984.11.13. 오아시스레코드)
  • 방미 - 무등산
    작사 : 양근승, 작곡 : 장덕. 앨범 : 방미 - Bangme 8 (1985.01.20. 한국음반)
  • 김형용 - 외로운 밤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김형용 - 외출/외로운 밤 (1986.04.15. 현대음반)
  • 이경 - 애인, 인생의 길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이경 - 1집 (1986.05.20. 태양음향)
  • 이은하 -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우리의 한강
    작사 : 이은하, 작곡 : 장덕. 앨범 : 이은하 - ’86 이은하 (1986.05.25. 한국음반) 
  • 이은하 - 여자의 샘
    작사 : 장덕, 김문엽, 작곡 : 장덕. 앨범 : 이은하 - ’86 이은하 (1986.05.25. 한국음반)
  • 이은하 - 소녀와 가로등, 지하철을 타고, 당신은 나, 애인,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이은하 - ’86 이은하 (1986.05.25. 한국음반)
  • 지예 - 바람처럼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지예 - 2집 (1986.08.15. 현대음반)
  • 김진아 - 묻지 마세요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김진아 - 1집 (1987.02.02. 현대음반)
  • 김영선 – 이 음악을 들어봐요, 슬픈 외면
    작사 : 장덕, 작곡 : 김정택. 앨범 : 김영선 - 사랑의 꿈/그대 내 마음속 깊이/슬픈 외면 (1987.11.10. 지구레코드)
  • 김범룡 - 빈가슴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김범룡 - 제4집 (1988.06.15. 서라벌레코드)
  • 예민영 - 기다리지 말아요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제2회 MBC 신인가요제 (1988.06.15. 서라벌레코드)
  • 훈이 - 고향친구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훈이 - 보낼수 밖에/이별의 상심/바다로 가요 (1989. 현대음반)
  • 김지애 - 미련
    작사 : 장덕, 작곡 : 김파. 앨범 : 김지애 - 4집 (1989.05.20. 현대음반)
  • 안다미 - 경험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안다미 - 달빛사랑/미련/미워서도 아닌데 (1989.10.15. 킹레코드)
  • 하춘화 - 꽃처럼 나비처럼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하춘화 - 날버린 남자/조각구름 (1990.06. 오아시스레코드사)
  • 마스코트 - 왜, 사랑하고 있나봐요, 백치미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마스코트 - 왜/1분만 더 (1990.10. 오아시스레코드사)
  • 성희 - 그래서 그런거야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성희 - 사랑은 길어요/누군가 그리워져요/애인 (1990.11. 오아시스레코드사)
  • 임병수 - 사랑은 사랑대로 이별은 이별대로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임병수 - 5 (1990.12. 서울음반)
  • 연석원 - MORNING
    작사 : 장덕, 작곡 : 연석원. 앨범 : 연석원 - THE MERMAID (1991.02. 오아시스레코드사)
  • 김성필 - 우리 사랑 영원히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김성필 - 가슴 가득 남아있는 그대 / 비오는 날엔 (1991.09.15. 지구레코드)
  • 강용욱 - 좀더 가까이, 비 그리고 사랑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강용욱 - 샐러리맨의 블루스 (1991.11. 현대음향주식회사)
  • 권은아 - 만날 수 없는 사람
    작사, 작곡 : 장덕. 앨범 : 권은아 - 당신이 미워요/여자가 홀로 우는 밤 (1992.01. 현대음향주식회사)















































매체기사 ∙ Art·icle


  • 장현, 장덕 남매와 어머니 이숙희 님의 모습, 1969년 5월 주부생활
  • 레퍼터리는 직접 작사·작곡까지 이색적인 남매듀엣 ‘현이와 덕이’, 1975.8, 선데이 서을
  • 인기 두엣 현이와 덕이, 1975.9.21., 주간여성,
  • 다재다능한 목소리와 연기로 귀염받는 현이와 덕이
  • 현이와 덕이 데뷔앨범 친구야 친구야
  • 장덕의 영화 <푸른교실> O.S.T 작업과 영화 <젊은이의 도시> 주연으로 출연한 장현.
  • 뉴∙페이스 듀우엣 현이와 덕이 우리는 남매
  • 영화 <선생님 안녕>에 O.S.T로 참여한 현이와 덕이
  • 남매 두엣 현이와 덕이가 첫 레코드 모음집 <순진한 아이>를 취입 현이와 덕이 팬들의 염증 씻을 노래 기대, 1979.1.21., 주간여성
  • 어제 오늘 등 8곡 선정 성루국제 가요제
  • 79‘ 서울국제가요제 정덕이 제작한 <사랑이었네>는 본선에 진출하였다.
  • 崔誠洙(최성수)「남남」 張德(장덕)「님 떠난 후」큰 인기, 1987.03.20., 동아일보 
  • 張德(장덕) 신곡 좋은 반응, 1987.10.23., 조선일보
  • 메시지 담긴 노래....수준향상"괄목", 1987.12.30., 조선일보
  • 탤런트겸업 歌手(가수)들 인기, 1989.12.06., 경향신문
  • 가수張德(장덕)양 藥物(약물)과다복용 숨져, 1990.02.05., 동아일보 
  • 가수張德(장덕) 숨져, 1990.02.05., 경향신문
  • 가수 장덕씨 사망 수면제등 약물과다복용, 1990.02.06., 한겨레 
  • 張德(장덕)씨 꼭 살려 내겠다 아버지 뿐철학 총동원, 1990.02.06., 경향신문 
  • 張德(장덕)아버지「딸蘇生術(소생술)」시도, 1990.02.07., 조선일보
  • 가수 장현씨 숨져, 1990.08.17., 조선일보
  • 悲運(비운)의 남매가수 "애틋한 요절", 1990.08.17., 경향신문 
  • 장현·장덕추모앨범 「소녀와...」등 담아, 1992.07.23., 경향신문
  • 추억 속 그 노래를「추억」속에, 1998.08.26., 조선일보
  •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 2013.03.16., 이투데이
  • 'TV 라때는' 임성훈 "故 장덕, 천재 뮤지션", 2020.10.01., 스타뉴스
  • 장덕, 오빠 장현과 함께 '비운의 남매'! 너무 일찍 떠난 스타!, 2020.10.01., 내외뉴스통 
  • 24일 가수 장덕 30주기 음악공연…인천 극장 플레이캠퍼스, 2020.10.21., 인천일보
  • '천재 싱어송라이터' 故장덕 30주기 맞아 남이섬에 노래비 건립, 2020.12.14., 연합신문
  • '천재 싱어송라이터' 故장덕의 노래, 후배 뮤지션들이 재해석, 2020.12.22., 연합뉴스
  • ‘80년대 아이유’ 장덕, 곁에 없지만…“사랑했던 마음은 남아있어요”, 2021.01.25. 한겨레
  • 미소를 띄우며 보낸 그 모습처럼, 2021.01.26., 서울신문
  • [나의 노래] 진미령의 '소녀와 가로등', 2021.01.26., 중도일보
  • 모트가 부르는 '천재 뮤지션' 장덕의 노래는…리메이크 발매, 2021.01.12., 연합뉴스
  • '80년대 아이유' 장덕..."30여 년 흘러도 세련된 곡", 2021.02.07., YTN
  • 故장덕을 기억하며…트리뷰트 프로젝트 세번째 곡 '얘 얘', 2021.02.09., 연합뉴스




























예정된 시간을 거슬러


정우영 – 프리랜스 에디터

송창식은 솔로 데뷔 이전의 장덕을 만난 적이 있다. 장덕의 어머니이자 서양화가 이숙희와의 친분으로 집들이에 갔다. 3년 전, 중학교 2학년 때 작곡했다는 ‘소녀와 가로등’을 ‘라이브’로 들었고 그 비범한 재능을 알아봤다. 송창식은 제1회 MBC 서울가요제 출품을 적극 권했을 뿐만 아니라 지원했다. 장덕의 천재성을 이야기할 때 곧잘 회자되는 장면.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소녀와 가로등’으로 출전한 서울가요제 무대. 당시 규정상 작곡가가 가수와 함께 출연해야 했고,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아직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 진미령이 아닌 커다란 보타이와 베레모가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맑고 깨끗한 외모의 장덕이었다. “이 소녀가 작곡가라고?” 누구라도 놀라고 말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장사는 경악이지 사실이 아니다. 장덕은 그때부터 ‘천재 미소녀’였고 지금까지 그뿐이다.
-장덕은 하이틴 스타였다. 열네 살에 오빠와 팀을 이뤄 ‘드래곤 래츠’란 이름으로 미8군 주최 파티 무대에 섰고 곧이어 TBC의 청소년 프로그램 <오라오라>에 출연해 창작곡 무대도 선보였다. 현이와 덕이로 개명하고 이어나간 음악 활동도 있었지만, <내 마음 나도 몰라>, <우리들의 고교시대> 같은 작품에 이름을 올린 배우이기도 했다. 서울가요제에 3년 연속 작사, 작곡가로 입상하는 기록도 스무 살 이전에 세웠다. 그래서 1980년 10월, 어머니가 계신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 그의 선택은 뜻밖이었다.
-새어머니가 박지만과의 맞선을 주선한 탓이라는 소문이 전하지만 석연치 않다. 장덕에게 노래는 겨우 그 정도였을까? 팬에 의한 다섯 번의 납치 사건을 겪고, 세 번의 자살 소동을 일으켰던 청년에게 너무 야멸찬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장덕이 보여준 놀라운 재능과 성취가 있었기에 가능한 질문이기도 하다. 장덕에게 노래는 단지 노래가 아니었다.
-장덕이 악기를 잡고 노래를 만들고 음악활동을 하는 모든 계기에 가족이 등장한다. 초등학교 2학년, 부모님의 이혼 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냈을 뿐만 아니라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다. 이때 너무나 외로워하는 장덕에게 기타를 쥐여준 것도, 후일 솔로 3집의 실패로 의기소침한 장덕에게 ‘현이와 덕이’ 재결성을 제안한 것도 오빠 장현이다. 애초에 겨우 중학교 1학년 때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에 충격받아 장현과의 듀엣을 제안한 것은 어머니였다. 또한 하이틴 스타 ‘장덕’이 있게 한 ‘소녀와 가로등’은 어머니, 오빠와의 해후 후 그들을 보낸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장덕에게 노래는 빈 가족의 대체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한 창작자가 그의 결핍을 창작물로 갈음하는 이야기는 익숙하다. 등가관계가 아닌 것들의 교환에는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창작 활동을 거듭하는 것에 따라 인간적 성숙도 이뤄지곤 한다. 하지만 장덕은 솔로 3집까지의 음악으로 예단하건대, 주체적인 어른이지도 그렇다고 음악가로서 어떠한 창작론을 갖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 그는 모음집 수준의 앨범, 의도보다는 방황이 더 두드러진 앨범에 머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른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듣기엔 좀 옛날 음악 같았어요.” 1970년대 초반생인 비트볼 레코드의 이봉수 사장이 장덕을 회고했다. 세대는 달랐지만 장덕이 각각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중반의 전성기가 있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기억했다. 대중음악사로 다시 한번 구분하면 음악계에 불어닥친 대마초 파동 이후 그리고 김완선이 데뷔한 시점이다. 전자는 검열로부터 안전한 성인가요 일색의 시장으로 재편되는 계기였고, 후자는 전자/댄스 음악과 아이돌 음악으로의 전환기였다. 어린 장덕의 기특하고도 무해한 음악이 70년대 후반 각광 받은, 미국에서 돌아와 발표한 두 장의 앨범이 실패한 배경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하지만 장덕의 음악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3집까지는 매우 두드러진, 4집부터는 어쩌면 그의 특징으로 규정할 수 있는 자신보다 윗세대의 취향-성인가요의 취향이 있다.
-한없이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어린이가 있다. 음악가 아버지와 화가이자 음악 애호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취학 전엔 피아노를,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기타를 쳤다. 하지만 그에게는 연주를 들려줄 사람은커녕 의지할 사람조차 곁에 없었다. 그래도 가끔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혼자였던 시간이 무색하게 압도적인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어린이는 “아니 어쩜 어린 애가 파김치를 이렇게 잘 먹어”라고 어른이 말하면 그만 먹고 싶어도 계속 먹는다. 어린이가 무리하게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사건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테고 특별할 것도 없다. 하지만 뭇 어린이에게는 ‘해프닝’이었을 일이 장덕에게는 삶이었다. 하필 노래가 그의 파김치였다.
-물론 ‘소녀와 가로등’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빠를 보내기 아쉬워하는 소녀의 마음이고, ‘날 찾지 말아요’에서는 “철없던 소녀가 사랑을 했던 거예요”라고 노래하지만 정서적으로 음악적으로 공히 한스러운 성인가요의 표현을 한다. ‘소녀와 가로등’은 1977년에 발표한 곡이다. 1975년의 가수왕은 송창식이었지만 1976년의 가수왕은 송대관이었다. 이 극적인 변화의 시기, 장덕은 가사에서는 소녀를 말하고, 노래로는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나아가 시대가 편안하게 품을 수 있는 길로 자연스럽게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3집은 조금 다른 맥락이 있다. 장덕은 이제 어엿한 성인 가수로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하지 않을래’, ‘사랑의 꿈’을 제외한 모든 곡을 진한 성인가요로 채운다. 그의 나이 스물 네 살이었다. 마치 두꺼운 화장으로 어른 흉내를 낸 청소년을 보는 듯한 감상이 여기에도 있다. 다만 일관돼서 분명해지는 것도 있다. ‘사랑하지 않을래’와 ‘사랑의 꿈’에서 드러나는 장덕의 댄스 음악에 대한 의지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 간절하고 간절한 마음이 담긴 악곡이다.
-비유하자면 3집과 4집의 차이는 자취와 분가다. 장덕은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과 함께 다시 양지로 올라온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딱 한 장의 앨범 발표 후 솔로로 돌아가는데 “(오빠와는) 추구하는 음악 세계가 다르다”는 그의 선택이었다고 전한다. 장덕은 오빠가 결혼하자 혼자 살림을 꾸린 뒤 외로움에 지쳐 동맥을 끊으려고 했던 소녀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선택은 한낱 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장덕의 음악은 4집부터 일가를 이룬다.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과 온전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구분해서 자취와 분가라고 썼지만, 4집에 더 적절한 단어는 자립이다. 자취나 분가는 ‘본가’ 없이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자립은 본가가 필요치 않은 주체적이고 현대적인 양식이다. 과거에나 그때나 장덕은 작곡가로서 ‘좋은 음악’을 쓰려고 했을 테지만, 이 음반부터는 ‘자기 음악’, ‘다른 음악’에 대한 고민을 하고 ‘천재’라는 단어가 쓸데없어진다.
-편곡가 김명곤의 역할이 적지 않다. 코러스로부터 감정을 극적으로 움직이는 코드 진행, 아주 편안한 버스 멜로디조차도 낯설게 만드는 그의 보이싱을 십분 이해하고 그것을 억누르기보다 확장하는 방식으로 도왔다. “평면적인 음악을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죠.” 하몬드 오르간 연주자 림지훈이 말하는 보이싱이다. 이를테면 보이싱처럼 자주 거론되는 그의 음악적 특징은 여기부터 너무 지엽적인 말 같다. 그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창의적인 편곡을 지향하는, 현대적인 아티스트의 길에 들어선다. 딱히 도입부처럼 들리지 않는 ‘님 떠난 후’의 전주, 리버브를 먹인 스네어로 분위기를 순간적으로 환기하는 같은 곡의 간주가 그렇고, ‘사랑해줘요’의 뚝뚝 끊기는 리듬과 그 리듬과 별개의 평화로운 오르간, ‘이팔청춘의 고백’의 미니멀한 키보드와 분명한 백비트를 따라갈 듯 말 듯 삽입되는 기타 같은 예가 수두룩하다. 다시 림지훈은 말한다. “보이싱이 중요하다기보다 시대가 굳었을 때도 머리가 굳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이 창의적인 접근 속에서 쉽고도 직설적이나 기품이 있고, 애절하지만 과장 같지 않은 그의 노래는 흐려지기는커녕 선명해진다. 이때 그의 노래는 기술이나 형식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확신이 있다. ‘비가 내려요'의 절창까지 나아가는 것이 과연 이전에도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다. 드디어 장덕은 어른이 됐다. 자신을 타인처럼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됐다. 노래는 가족과 분리된 다른 뭔가가 됐다. 과거부터 자신에게 있었지만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 누구보다 자신을 밀어붙여야 하는 것.
-‘얘얘’가 수록된 5집은 그가 외려 젊어졌다는 것을, 프로듀서적인 면모까지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앨범이다. 50년대 개러지, 로큰롤 형식의 ‘얘얘’는 소위 ‘틴 비트(Teen Beat)’ 다. 장덕의 음악 사상 가장 밝고 명랑한 코러스와 빠르고 간결한 리듬이다. ‘나의 꿈 이야기’는 흡사 동요를 대하는 감상이 드는 맑고 아름다운 곡이다. 장덕의 지난했던 시간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감격스럽기까지 한 두 곡. 또한 5집은 김파, 김범룡이 ‘얘얘’를 비롯한 3곡의 작곡을 맡았음에도 가장 매끄럽고 유려한 앨범이다. 장덕은 대중음악 앨범을 가족의 대체물도, 자기증명도 아닌 하나의 완결된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너에게 안녕을 고할 때’처럼 장덕 특유의 성인가요 취향이 담긴 곡도 있지만 ‘점점 더 가까워져요’, ‘나를 불러줘’처럼 동시대의 도회적인 감성이 담긴 소프트 록도 있으며, ‘사랑의 느낌’이나‘, ’내 말 좀 들어요’처럼 한국적인 발라드를 지향하는 곡도 있다. 장덕의 걸작은 4집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더 애정이 가는 건 5집이다. 장덕 스스로 가장 편안했던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서. 장덕은 그 음악만을 이야기할 수 없는 가수, 그것이 행운인 경우도 더러 있지만 비극이 되고 만 가수였다.
-예정된 순서가 왔다. 1989년 6월에 발매된 6집은 채 정당한 평가를 받기도 전에 설암 판정을 받은 오빠의 병간호를 이유로 활동을 중단한 앨범이었다. 다음해 2월 장덕이 세상을 떠나면서 정당한 평가의 기회는 추모와 추모 앨범에 의해 닫힌 면도 있다. 하지만 6집의 음악적 야심, 표현과 그가 발매 직전부터 겪는 비극은 큰 관련성이 없다. 6집에서 장덕은 부기(Boogie)를 적극 시도했으며, 5집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고른 취향의 곡들을 보여줬다. 하지만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나의 공주님’을 들으며 창작자의 의도와 어긋난 슬픔을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고, 어쩌면 이 앨범은 장덕의 비극에 영원히 가려질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장덕은 6집 앨범 작업 막바지에 장현이 설암이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코아기획을 설립하고 장덕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했던 오빠였기에 “자신의 일에 신경쓰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생긴 병”이라고 여겼다. 수면제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밤들이었다. 장덕은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 세 가지 약의 동시복용으로 인한 상승작용으로, 즉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미 예전의 장덕이 아니었으므로 이후 음악 활동이 이어졌다한들 이전처럼 가족의 영향 속에서 음악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고 덮어놓거나 한 쪽으로 치워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 듯하다.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그의 곡은 성인가요 풍의 ‘님 떠난 후’다. 장덕의 성인가요적 표현은 어려서는 환경에 의해, 좀 더 커서는 살아남는 방법으로서, 언제인가부터는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펼쳐졌다. 성인이 된 후 동세대의 청자들이 장덕을 옛날 가수처럼 여긴 원인도 그것이지만, 애절하기 이를 데 없는 정서도 그것에 의해 유지됐다. 똑같은 표현의 차이를 만든 게 있다면 새로운 음악에 대한 도전이었다. 장덕은 어느 지점까지는 수동적으로 자신의 과거에 매어있었고 죽음 직전까지는 집착적으로 새로운 음악, 다른 음악을 시도했다. 반성과 도전은 천재가 아닌 뭇 사람의 것이고 대중음악은 차라리 박제된 천재보다 늘 갱신될 수 있는 범인을 요구한다. 장덕의 사후 30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은 비어있는 천재의 자리에 무의미한 박수를 보내면서 그를 가둬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것이 장덕에 대한 재조명이 늘 똑같은 헛된 수사만으로 끝난 것은 아닐는지 묻고 싶다.
-“노래는 그 가수 혹은 창작자일까?” 는 영원한 질문이다. 적어도 장덕의 노래는 장덕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노래를 자신에게 종속시키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할 무렵 그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순정하게 가수 자신을 담은 노래보다 그 이름과 삶이 사후까지 더 유명한 역설이 그에게는 있다. 물론 여자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이 노래보다 ‘구경거리’가 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장현의 아들이자 장덕의 조카 장원은 고모와의 에피소드 한 토막을 이야기했다. 고모와 한 집에 살았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이제 막 전학을 와서 낯선 조카에게 준 선물에 관해. “(초등학교인 자신과 활동 시간대가 안 맞아서 거의 볼 수 없는 와중에도) 어느 날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라고, 자기 사진에 일일이 사인한 엽서를 이만큼 뭉텅이로 주셔가지고, 학교 가서 자랑도 많이 하고 나눠도 줬죠.” 장덕은 자신의 이름이 가진 무게를 무릅쓰면서 음악을 했던 것 같다. 장덕의 이름과 삶에 담긴 슬픔을 무릅쓰고, 그 음악에 새삼스레 귀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인터뷰  · Interview



인터뷰 일시
2021.01

인터뷰 장소
루비레코드 사무실

인터뷰어
고경표, 오석근

촬영
권준엽, 김재면